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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을 다시 부르는 전시의 기록, 『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 (고경옥, 현실문화)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페미니즘 미술을 전시와 아카이브로 복원한 연구서
출판사 제공
한국 미술사에서 페미니즘은 오랫동안 주변부에 머물렀다. 몇몇 작가의 이름은 남았지만, 어떤 전시가 열렸고 어떤 문제의식이 공유됐으며 어떤 실천이 당대의 현실과 맞물려 있었는지는 충분히 정리되지 못했다. 『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은 바로 그 비어 있던 자리를 파고든다. 개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전시’라는 사건을 통해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형성과 전개를 다시 읽어낸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까닭은 출발점에 있다. 저자 고경옥은 한국의 페미니즘 미술을 서구 이론의 단순한 수용으로 보지 않는다. 산업화와 민주화운동, 여성운동, 지역의 미술 현장과 문화운동이 겹쳐지는 자리에서 한국적 조건 속의 페미니즘 미술이 자생적으로 형성됐다고 본다. 이 시선은 페미니즘 미술을 외부에서 들여온 담론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균열과 저항 속에서 자라난 실천으로 읽게 만든다.
책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가로지르며 전시의 흐름을 촘촘히 추적한다. 시월모임, 터 그룹, 여성미술연구회, 그림패 둥지, 만화패 미얄, 『우리 봇물을 트자』 같은 초기의 움직임은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맥락 속에서 다시 놓인다. 이어 1990년대로 넘어가면 30캐럿, 『여성, 그 다름과 힘』, 부산 지역의 전시들, 『99 여성미술제: 팥쥐들의 행진』을 통해 페미니즘 미술이 더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확장되는 장면이 펼쳐진다.
저자가 특히 공을 들이는 지점은 기록의 복원이다. 전시는 단순한 발표의 장이 아니라 누가 함께했고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어떤 관계망과 집단적 실천이 존재했는지를 가장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전시는 미술사 바깥으로 밀려났던 이름들을 다시 불러오는 통로가 된다. “승자 중심의 역사 기술”에 맞서 소외와 누락의 자리에 있던 실천을 끌어올리려는 문제의식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아카이브와 구술 채록을 함께 활용한 점도 이 책의 힘이다. 문헌 기록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사건의 공백을 인터뷰로 메우고, 남아 있는 자료와 증언을 겹쳐 당시의 현장을 더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이는 단순한 자료 정리에 그치지 않는다. 누가 기록되고 누가 지워졌는지, 미술사는 어떤 방식으로 구성돼 왔는지까지 되묻게 한다.
1990년대 이후의 변화상을 다루는 방식도 의미심장하다. 민주화 이후의 사회 변화와 포스트모더니즘, 소비문화, 지역 화단의 움직임은 페미니즘 미술의 장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책은 이를 하나의 정답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갈래의 전시와 집단, 지역의 흐름을 따라가며 페미니즘 미술이 논쟁과 확장 속에서 움직여 왔음을 보여준다. 서울 중심의 미술사 서술에서 비켜나 있던 부산의 전시들을 비중 있게 다루는 대목도 그래서 반갑다.
이 책은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인 동시에, 미술사를 쓰는 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책이기도 하다. 전시라는 현장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관계와 목소리, 지워졌던 이름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 비어 있던 자리의 윤곽이 이제야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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