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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선율 위에 앉은 인생의 민낯, 『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음악이 흐르는 다섯 편의 이야기로 사랑과 상실, 실패 이후의 시간을 어루만진 단편집

장세환2026년 3월 24일 오후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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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jpg출판사 제공

노래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들리는 마음이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단편소설집 『녹턴』이 전면 번역 개정과 새로운 표지로 다시 독자를 찾았다. 노벨문학상과 부커상을 받은 이시구로가 빚어낸 이 책은 화려한 성공담보다 한 박자 늦게 도착한 후회,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 끝내 붙잡지 못한 젊음의 기척에 더 오래 귀를 기울인다. 제목 그대로 밤의 정서에 가까운 다섯 편의 이야기가 음악을 매개로 서로를 비추며, 인생의 저녁 무렵에야 선명해지는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펼쳐 보인다.

이번에 다시 나온 『녹턴』은 베네치아의 광장을 떠도는 기타리스트, 런던의 오래된 우정 사이로 스며드는 음악 취향의 기억, 몰번힐스의 언덕에서 꿈을 붙잡으려는 젊은 싱어송라이터, 할리우드 호텔방에서 성형수술 뒤 회복기를 견디는 색소포니스트, 그리고 이탈리아 광장에서 생계를 위해 연주하는 첼리스트의 사연을 차례로 담았다. 서로 다른 장소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다섯 작품은 마치 한 편의 음악처럼 이어진다. 한때는 찬란했으나 지금은 빛이 조금 바랜 사람들, 그래도 삶을 완전히 놓지 않은 사람들의 표정이 각 단편을 가만히 관통한다.

이 책에서 음악은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세레나데는 사랑의 마지막 예의가 되고, 오래된 음반은 변해 버린 관계를 비춘다. 첼로와 색소폰, 기타와 노래는 인물들의 자존심이자 상처이며, 끝내 자신을 설명해 줄 마지막 언어처럼 쓰인다. 그래서 『녹턴』은 음악 소설이라기보다, 음악을 빌려 인간의 체면과 외로움, 희망과 자기기만을 조용히 해부한 작품에 가깝다.

눈에 띄는 대목은 이시구로 특유의 절제다. 큰 사건을 밀어붙이지 않고도 인물의 균열을 드러내는 힘,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의 가슴을 오래 붙드는 힘이 여전하다. 젊은 시절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던 작가의 이력이 스며든 덕분에 문장 곳곳에서는 실제 연주를 듣는 듯한 리듬감도 살아난다.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사람은 무엇으로 자신을 버티는가. 『녹턴』은 그 질문에 거창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는 아직 연주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삶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민음사는 이번 재출간을 통해 이시구로의 원저작 출판사와 협업한 새 표지를 선보였다. 이미 오래 사랑받은 작품이지만, 이번 개정판은 『녹턴』을 처음 만나는 독자뿐 아니라 오래전 읽었던 독자에게도 다시 꺼내 읽을 이유를 만든다. 한물간 가수, 늦어진 성공, 어긋난 사랑, 조금 초라해진 꿈. 이시구로는 그런 것들을 결코 초라하게만 남겨두지 않는다. 음악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오히려 인생의 쓸쓸함이 더 깊어지듯, 『녹턴』은 사라져 가는 것들의 품위를 끝내 지켜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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