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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끌려가지 않고 돈의 얼굴을 다시 보다, 『돈의 열두 가지 얼굴』 (류상철·박종호·정태관, 한길사)
거래의 수단을 넘어 기억과 신뢰, 욕망과 관계까지 묻는 돈의 인문학
출판사 제공
매일 아침 스마트폰 화면에 먼저 뜨는 것은 사람의 얼굴보다 숫자일 때가 많다. 주식 계좌의 등락, 예금 잔액, 카드 결제 알림, 대출 이자와 환율의 변화가 하루의 기분을 흔든다. 돈은 오래전부터 거래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이제는 불안과 안도, 비교와 욕망까지 좌우하는 기준으로 자리를 넓혀 왔다. 『돈의 열두 가지 얼굴』은 바로 그 익숙한 숫자 뒤로 물러나 있던 질문, “그래서 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다시 꺼내 든 책이다.
이 책은 재테크 기술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돈의 정체를 인격, 기억, 시간, 가치, 신뢰, 부채, 행복, 가족 같은 서로 다른 열두 개의 얼굴로 나눠 들여다본다. 한국은행에서 36년을 보낸 경제학자 류상철, 부동산 금융의 현장을 오가며 실무를 쌓아 온 박종호, 금융 인프라와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경험한 정태관이 함께 토론하며 정리한 결과물답게, 경제 이론과 현실 감각, 인문학적 질문이 한 권 안에서 맞물린다.
책이 특히 눈길을 끄는 지점은 돈을 단순한 종이와 숫자로 보지 않는 데 있다. 저자들은 화폐를 사회가 거래의 기억을 보관하는 장치로 설명한다. 내 통장에 찍힌 월급은 단순한 액수가 아니라 내가 사회에 어떤 가치를 제공했는지 남겨진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은 중앙은행과 블록체인, 지폐와 계좌이체를 서로 다른 기술이 아니라 신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읽게 만든다.
동시에 책은 돈의 어두운 얼굴도 숨기지 않는다. 돈은 자유를 주지만 사람을 고립시키기도 하고, 레버리지는 기회를 넓히지만 부채의 무게로 삶을 짓누르기도 한다. 자산이 많아도 당장 쓸 현금이 마르면 위기가 닥치고, 개인의 빚은 관계를 타고 번져 공동체 전체의 신뢰를 흔든다.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하지만, 불행을 막는 방파제 구실을 한다는 진단도 그래서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이 책은 돈을 숫자만으로 보지 말자고 권한다. 첫 월급을 건네던 날의 감정, 가족에게 건네는 용돈과 축의금, 타인을 위해 돈을 쓸 때 생기는 관계의 온기까지 함께 보아야 돈의 실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을 얼마나 가졌는가보다, 그 돈이 내 삶을 지키는 하인인지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주인인지 구별하는 일이다. 『돈의 열두 가지 얼굴』은 돈을 더 버는 법보다 돈에 휘둘리지 않는 시선을 먼저 묻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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