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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종교라는 통념을 다시 묻다, 『불교와 폭력』 (마이클 K. 제리슨, 이혜인 옮김, 운주사)
불교와 전쟁, 국가 권력, 성차별, 종교 갈등의 관계를 역사와 현장 연구로 추적한 연구서
출판사 제공
불교는 흔히 자비와 비폭력의 종교로 이해돼 왔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와 사회는 언제나 그 단순한 이미지로 설명되지는 않았다. 전쟁과 국가 권력, 성차별과 종교 갈등의 현장에서 불교는 때로 폭력에 저항했고, 때로는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묵인하는 체계 속에 놓이기도 했다. 『불교와 폭력』은 바로 이 불편한 질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운주사가 펴낸 이 책에서 종교학자 마이클 K. 제리슨은 “불교는 본질적으로 평화로운 종교인가”라는 통념에 의문을 제기했다. 저자는 불교를 하나의 고정된 평화주의로 보지 않고, 역사와 정치,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다양한 ‘불교 체계들’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문헌 연구를 넘어 분쟁 지역 조사와 인터뷰, 현장 사례를 바탕으로 불교와 폭력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추적했다.
책은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1장에서는 살생과 분쟁, 전쟁에 대한 불교의 교리적 입장을 다루며,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예외적으로 정당화돼 왔는지를 살핀다. 2장에서는 국가 폭력과 승려의 관계를 짚으며, 특히 태국 군주제와 상좌부불교 사회에서 종교 권위가 정치 권력과 결합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어 3장에서는 여성 수계 금지 문제를 중심으로 승가 내부의 성차별이 어떻게 구조적 폭력으로 작동하는지 들여다본다.
4장은 군종 제도와 불교 승려의 역할을 다룬다. 태국의 불교 군종 장교 사례를 통해 폭력과 종교 윤리가 충돌하는 접점을 살폈고, 5장에서는 태국 남부 분쟁 지역에서 불자와 무슬림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방식을 비교하며 종교가 갈등과 고통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준다. 6장에서는 신성모독과 불교 유물 훼손 문제를 다루며, 종교적 분노와 정치적 결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검토했다.
이 책의 특징은 불교를 비판하거나 부정하려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불교 내부의 폭력성과 권력 작동 방식을 직시함으로써, 종교가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평화의 가치와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저자는 언론과 학계가 종종 경전과 수행만을 중심으로 불교를 설명하면서, 실제 사회에서 불승이 행사하는 도덕적·정치적 권위는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불교와 폭력』은 결국 종교를 둘러싼 익숙한 신화를 흔드는 책이다. 불교를 둘러싼 아름다운 이미지 뒤편에서 역사와 현실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를 차분히 드러내며, 종교와 권력, 인간 사회의 폭력 문제를 함께 성찰하도록 이끈다. 불교 연구자뿐 아니라 종교와 정치, 갈등과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에게도 묵직한 질문을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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