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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의 오늘을 쓰다, 『한 줌 빛이 남은 동안』 신간 출 (윤정숙, 이um)

회고가 아니라 현재의 의식으로 기록한 생의 황혼, 삶을 다시 세우는 문장들

장세환2026년 3월 3일 오후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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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 빛이 남은 동안.jpg출판사 제공

1936년생 윤정숙 수필가가 아흔의 나이에 두 번째 수필집 『한 줌 빛이 남은 동안』을 펴냈다. 이 책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는 회고록에 머물지 않는다. 생의 황혼기에 선 한 인간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태도로 내일을 맞는지를 ‘현재의 의식’으로 써 내려간 고요한 기록이다. 삶을 요란하게 미화하지도, 섣불리 체념하지도 않는 문장들이 오히려 묵직한 온도를 남긴다.

책 속에는 노년이 마주하는 현실의 결이 생생하게 들어 있다. ‘노인 운전’이라는 사회적 논쟁 앞에서 남편의 운전을 둘러싼 가족의 걱정과 생활의 불편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난다. 원칙만으로는 정리되지 않는 일상, 교통이 닿지 않는 산골의 현실,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은 은퇴 이후의 삶이 한 장면씩 축적되며 노년의 삶을 추상에서 현실로 끌어내린다.

또한 작가는 ‘노인이어서’ 겪는 편견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장을 보러 간 알뜰시장에서 메모를 들여다본 청년의 한마디를 계기로, 나이 든 여성에게 덧씌워진 무식과 무례의 고정관념을 짚어낸다. 스스로 멋진 노인이 되고 싶어도 사회가 먼저 노인을 ‘원죄’처럼 규정하는 현실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들이 아프게 기록된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유만으로 설명을 요구받는 시대에 대한 성찰이 담담하지만 날카롭다.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도 깊다. ‘여자가 고생이다’에서는 환향녀라는 말의 기원과, 전쟁과 망국이 여성에게 남긴 상처를 되짚는다. 국가의 무능과 남성 중심 사회의 비겁함이 어떻게 여성들의 고통을 확대해 왔는지, 오래된 응어리로 남아 있는 문제를 개인의 분노와 역사 인식으로 함께 풀어낸다.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인 질문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책의 중심에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 ‘행인 6’에서는 인생을 무대에 비유하며, 하찮아 보이는 역할도 결국 의미 있는 소임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늙어가며 스스로를 잉여로 규정하는 자괴감이 찾아올 때, 작가는 남은 시간의 ‘배역’을 다시 묻는다. 거창한 결론 대신, 지금도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몸과 마음을 붙들고 마지막 역할을 감지덕지하겠다는 자세가 조용한 울림으로 남는다.

‘탓’에서는 비행기 소음 아래에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불평할 수 없는 조건과 받아들여야 했던 현실을 차분히 정리한다. 그러면서도 뜻밖의 ‘공평함’을 발견한다. 서울에서 가장 낮은 값의 아파트라는 평가가 종부세 부담에서 비껴가게 했다는 사실을 ‘선물’처럼 받아들이는 대목은, 노년의 삶이 가진 아이러니를 특유의 유머와 성찰로 엮어낸다. 견디며 살아온 시간이 결국 삶의 형태를 바꿔놓는다는 메시지가 묵묵히 스민다.

추천사에서 “유장한 필력의 물결”이라 평가했듯, 『한 줌 빛이 남은 동안』은 삶의 현장을 한 편의 이야기로 풀어내면서도, 늙어가는 사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끈질기게 묻는다. 아흔의 문장은 느리지만 흐릿하지 않다. 끝을 준비하는 글이 아니라, 남은 빛을 붙들고 오늘을 살아내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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