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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종이의 결, 고서가 말을 거는 순간, 『고서의 은밀한 매력』 (이재정, 푸른역사)
읽는 책에서 보는 책으로, 고서의 물성과 편집을 따라가는 15가지 장면
출판사 제공
박물관 전시장 유리 너머에 놓인 옛 책을 떠올리면, 먼저 겁이 난다. 내용을 읽기엔 글자가 멀고, 시대는 더 멀다. 『고서의 은밀한 매력』은 그 거리부터 바꿔 놓는다. 고서는 읽어야 할 대상이라는 고정관념 대신, 표지와 판형, 글자 배치와 여백, 소장자의 흔적까지 눈으로 관찰하고 감상하는 대상으로 끌어온다.
저자 이재정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조선 시대 금속활자와 고서를 연구해 온 사람이다. 그는 고서의 물성이 독서를 돕고 의미를 만들어 온 방식에 주목한다. 책을 넘기며 정보를 캐내기보다, 책 자체가 어떤 장치로 독자를 안내했는지 따라가 보자는 제안이다.
책은 『화엄경』, 『월인천강지곡』, 『조선왕조실록』 등 15종의 고서를 길잡이로 삼는다. 정간과 소자쌍행 같은 지면 설계, 구두점의 기원, 한글 병기와 같은 편집 선택이 어떤 효과를 냈는지 짚는다. 한때는 제목을 본문 첫 행에 넣고, 필요한 경우 다음 행에 편자 정보를 얹는 식으로 독서 동선을 만들었다는 설명처럼, 옛 책에도 오늘의 책 못지않은 편집의 기술이 스며 있었다.
관리의 기술도 이야기의 한 축을 이룬다. 습기와 해충을 막기 위해 책을 바람에 말리는 포쇄 같은 작업은, 책을 단지 기록물이 아니라 보존해야 할 자산으로 대했던 시대의 감각을 드러낸다. 또 왕이 직접 편집에 관여한 사례, 소장 도장과 내사기 같은 기록이 남긴 흔적은 책이 누구의 손을 거쳐 어떤 자리에서 읽혔는지를 보여준다.
시선은 한국 고서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양의 필사본 기도서와 『구텐베르크 성서』, 르네상스 시대 인쇄본까지 함께 살피며, 책의 형태와 재료가 어떤 필요와 조건 속에서 변해 왔는지도 조망한다. 종이 이전의 책에서 종이책으로 넘어가는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책’이라는 물건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손과 눈을 배려해 왔는지 실감하게 된다.
결국 이 책이 건네는 제안은 단순하다. 고서를 이해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한 번 제대로 보자. 글자 크기와 여백, 제목을 놓는 자리, 누군가 남긴 작은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읽지 못해 지나쳤던 고서의 온기가 그제야 손끝에 닿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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