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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 『작은 풀꽃으로 살아도』(정주일, 오늘의문학사)

흙과 바람, 마을의 기억을 품은 네 번째 시집

장세환2026년 1월 19일 오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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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풀꽃으로 살아도.jpg출판사 제공

정주일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작은 풀꽃으로 살아도』는 ‘큰 목소리’보다 ‘낮은 자리’에 오래 머무는 시들로 묶여 있다. 충북 영동 산촌에서 농사를 생업으로 삼아온 시인은 세상과 거리를 둔 삶 속에서도 시를 통해 끝내 바깥과 연결돼 왔다. 이 시집은 그 긴 시간의 결을 ‘나무와 시’에서 시작해 ‘마을’과 ‘사람’, 그리고 ‘서정의 연작’으로 확장하며, 농심의 감각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견뎌왔는지 조용히 보여준다.

시집의 첫 결은 자연과 일상에서 온다. 1부 ‘나무와 시’에 실린 민들레, 봉숭아, 종다리 같은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듯, 시인은 작고 흔한 존재를 제 삶의 중심에 놓는다. 농사일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시 속에서는 그 시간이 한 번 더 느려진다. 고추밭의 바람, 마당의 풀, 눈에 잘 띄지 않는 생명들이 문장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 서정은 장식적이지 않고, 오히려 단정하다. 꾸미지 않는 말투와 닮은 문장들이 자연을 ‘풍경’이 아니라 ‘살아가는 자리’로 그려낸다.

2부 ‘오라리 이장 선거’로 넘어가면 시선은 공동체의 속살로 들어간다. 마을의 정치와 소란, 사람 사이의 허풍과 미안함, 그리고 “엄니”로 이어지는 연작은 농촌의 생활사를 개인의 감정선으로 받아 적는다. 웃고 넘길 듯한 에피소드가 스치다가도, 결국 남는 건 관계의 무게다. 마을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 웃음과 체념, 애틋함이 어떻게 겹쳐지는지, 시인은 과장 없이 붙잡아 둔다.

3부 ‘안개 마을’은 이 시집의 기류를 바꾼다. 안개라는 자연 현상을 매개로, 불확실한 현실과 마음의 그늘이 번진다. 하지만 끝내 주저앉지 않는다. 멈칫거리는 순간을 지나, 다시 일어서는 농심이 시의 결말을 잡아준다. 여기서 자연은 위로의 배경이 아니라, 버티는 방식 그 자체가 된다.

마지막 4부 ‘돈대리 서정’은 30편의 연작으로 구성돼, 한 마을의 정서를 길게 호흡하게 한다. 짧은 시들이 이어지며 만들어내는 누적의 힘이 있다. 한 편씩 읽을 때는 조용하지만, 연작으로 따라가다 보면 삶의 리듬이 선명해진다. 같은 땅을 밟고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들이 반복될수록, 시는 더 단단해진다.

『작은 풀꽃으로 살아도』는 세상을 단숨에 바꾸겠다는 선언 대신, 매일의 일을 견디는 사람의 언어를 택한다. 들풀처럼 작아도 자기 자리에서 계절을 건너는 것, 그것이 시인이 끝내 붙드는 삶의 방식이다. 이 책을 덮고 나면 ‘큰 문장’보다 ‘지켜낸 하루’가 더 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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