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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확신을 잠시 내려놓는 용기, 『자폐의 현상학과 윤리를 위하여』(크리스티엔 헨즈)
진단의 언어가 가린 삶을 다시 읽는 철학, 자폐를 ‘고정’이 아닌 ‘생성’으로 바라보기
출판사 제공
우리는 자폐를 안다고 믿는다. 진단 기준과 뇌 영상, 유전자라는 단단한 증거들이 그 믿음을 떠받친다. 하지만 『자폐의 현상학과 윤리를 위하여』는 그 확신의 뒤편을 정면으로 비춘다. 벨기에 생명윤리학자 크리스티엔 헨즈는 질문한다. 과학이 세운 설명 안에서 정작 당사자의 살아 있는 경험은 어디에 놓였는가. 이 책은 자폐를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환경과 관계 속에서 변화하고 협상되는 ‘역동적 정체성’으로 되돌리는 철학적 탐구다.
책은 먼저 자폐가 무엇으로 ‘정의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임상 진단이 어떻게 한 사람을 분류하고, 그 분류가 다시 그 사람의 삶을 규정하는지 살핀다. 저자는 진단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진단이 도구여야지 선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특정 시점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가, 삶 전체를 덮는 라벨로 굳어지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핵심은 ‘설명’의 윤리다. 자폐를 마음 이론의 결핍 같은 단일한 틀로만 해석할 때, 자폐인은 언제나 부족한 쪽으로 배치된다. 헨즈는 공감의 어려움을 한쪽의 결함으로 돌리기보다, 서로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부딪히는 ‘관계의 난이도’로 다시 본다. 여기서 자폐인의 침묵, 반향어, 몸짓 같은 표현은 결손의 증거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언어가 된다. 문제는 그 언어를 듣지 않기로 한 사회의 태도다. 저자가 말하는 ‘인식론적 부정의’는 타인을 ‘아는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며, 자폐를 둘러싼 가장 조용한 폭로처럼 읽힌다.
3부에서 책은 더욱 현대적인 논쟁으로 들어간다. 유전자는 설계도가 아니라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켜지고 꺼지는 스위치에 가깝다는 관점, 후성유전학과 ‘내재 작용’ 같은 개념을 통해 자폐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과정으로 다룬다. 이 시선은 희망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책임의 방향을 바꾼다. 바꿔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과 관계의 조건일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치료와 지원의 의미도 여기서 달라진다.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이 덜 다치며 만날 수 있게 하는 조율이 된다.
『자폐의 현상학과 윤리를 위하여』는 위로를 빠르게 건네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너무 빨리 규정해 온 것들을 멈춰 세우고 다시 묻게 만든다. 진단을 삶의 전부로 만들지 않기, 타인의 경험을 내 언어로만 번역해 소유하지 않기, 그리고 서로의 불확실성을 견디며 함께 사는 윤리를 연습하기. 이 책은 그 불편한 자리에서 시작해, 자폐와 비자폐가 함께 열어 갈 미래를 조용히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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