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 상세
전염병 이후의 죄와 욕망을 정면으로 비춘다, 『창궐』 (이치호 미치, 비채)
나오키상 수상작이 묻는 재난 이후의 윤리와 연대
출판사 제공
전염병은 건강뿐 아니라 관계와 판단의 기준까지 뒤흔든다. 불안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타인을 더 빨리 단정하고, 자기 안의 모순은 더 깊이 숨긴다. 온라인에서는 비난이 놀이처럼 번지고, 해명보다 폭로가 먼저 퍼진다. 그런 시대에 문학은 묻는다. 우리는 재난을 지나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잊었는가.
이 질문을 피해 가면 다음 단계도 없다. 재난 이후 사회가 다시 굴러가려면, 상처의 표면만 닦는 대신 상처가 남긴 욕망과 죄의식을 들여다봐야 한다.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면 마음은 잠깐 편해지지만, 그 편안함이 다시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도 함께 봐야 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끝까지 따라가게 하는 이야기다.
비채는 나오키상 제171회 수상작인 이치호 미치의 소설집 『창궐』을 펴냈다. 민경욱 번역. 책은 원인 불명의 전염병이 번진 도시를 배경으로 여섯 편을 묶는다. 미스터리와 스릴러, 범죄와 추리, 판타지의 문법을 오가면서도, 끝내 한 가지 감정으로 돌아온다. 재난 속에서 사람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또 얼마나 쉽게 남을 심판하는가.
각 단편은 사건 자체보다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순서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죽은 줄 알았던 친구를 스무 살에 다시 마주하는 남자, 배달원을 다시 보고 싶다는 욕망이 집착으로 번지는 주부, 자신이 왜 죽었는지 확인하려고 고향을 떠도는 유령, 재난 이후 삶이 망가진 이들이 모인 자살 모임까지, 인물들은 모두 현실에서 한 발만 비틀면 닿을 법한 얼굴을 하고 있다. 독자는 그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보면서도, 그 잘못이 생겨난 온도를 함께 느끼게 된다.
수상 소식은 이 소설집이 던질 질문을 먼저 드러냈다. 심사위원들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몰입감을 높게 평가했다. 『창궐』의 힘도 거기에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쉽게 판결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에게 묻게 만든다. 나는 어디까지 무죄인가, 내가 돌을 던진 적은 없었는가.
『창궐』은 전염병을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 재난 이후의 일상 전체를 겨눈다. 우리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정상이라는 말 아래 남겨둔 것들이 너무 많다.
관련 기사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