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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의 단편에서 오늘의 삶을 다시 꺼내 읽는 법, 『쥬디 할머니』 (박완서, 문학동네)
소설가 31인이 고른 박완서 명단편 10편을 한 권에 담다
출판사 제공
박완서의 단편은 언제나 한 시대를 넘겨도 사라지지 않는 질문을 남긴다. 가난과 계급, 가족의 이면, 여성의 삶처럼 익숙한 단어들이 그의 문장 안에서는 매번 다른 얼굴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읽다 보면 마음 한편이 찔리고, 동시에 묘하게 맑아진다. 박완서 타계 15주기를 기리며 묶인 『쥬디 할머니』는 그 깊고 날카로운 단편의 힘을 다시 확인하게 하는 책이다.
문제는 우리가 거장을 너무 익숙한 이름으로만 소비한다는 데 있다. 유명한 대표작 몇 편으로 박완서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단편이 파고드는 인간의 심연은 종종 놓친다. 시대가 바뀌면 감정의 표정도 달라지는데, 고전으로 굳어 버린 작품은 현재의 감각과 멀어지기 쉽다. 그 결과 ‘명작’이라는 칭찬만 남고, 왜 지금 읽어야 하는지는 흐려진다. 그래서 필요한 건 다시 읽기다. 이미 알고 있던 박완서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흔드는 박완서를 만나는 읽기다.
이 책은 그 필요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기획됐다. ‘박완서 단편 소설 전집’에 수록된 97편 가운데 31명의 한국 대표 소설가에게 최고 작품을 추천받고, 최종 10편을 선해 한 권으로 엮었다. 널리 회자되는 「도둑맞은 가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같은 대표작뿐 아니라,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오늘에도 주목할 만한 「쥬디 할머니」, 「애 보기가 쉽다고?」,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같은 작품이 함께 실렸다. 익숙함과 의외성이 한 권 안에서 맞물리며, 박완서 단편의 스펙트럼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읽는 재미는 반전과 리듬에서 나온다. 박완서의 문장은 대개 조용히 시작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독자의 방심을 꿰뚫는다. 인물의 감정이 휘청이는 순간을 과장하지 않고, 삶이 조금씩 흔들리는 징후를 촘촘히 쌓아 올리다가 마지막에 허를 찌른다. 그 반전은 트릭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해 온 현실의 결을 다시 보게 만드는 장치다. 가족이라는 말이 어떻게 상처가 되는지, 가난이 어떻게 소명이 되는지, 나이 듦과 돌봄이 어떻게 부끄러움과 분노로 바뀌는지, 그 변화가 납득 가능한 속도로 다가온다.
이 책이 남기는 의미는 박완서의 단편을 기념품처럼 모아 둔 데 있지 않다. 새해를 맞이하며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는 기획의 말처럼, 독자는 단편을 통해 자신의 현재를 점검하게 된다. 지금 내가 믿는 가치가 정말 내 것인지, 내가 무심코 반복한 말과 시선이 누군가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가족과 사회가 만들어낸 틀이 내 삶을 어디까지 규정했는지 묻게 된다. 단편을 덮고 나면,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남는다. 그 감정이야말로 박완서가 여전히 현재형으로 읽히는 이유다.
박완서의 단편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흔드는 현재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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