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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읽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강지연, 파이돈)

말기돌봄의 시간·공간·관계에 대한 의료인류학적 탐구

한성욱2026년 8월 24일 오후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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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jpg출판사 제공

죽음은 단순히 심장이 멎는 순간일까, 아니면 오랜 시간에 걸쳐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일까. 의료인류학자 강지연의 신간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는 서울의 한 상급종합병원 말기암 병동에서 2년간 참여관찰한 기록을 바탕으로, 생애 마지막 시기를 인류학적 시선으로 탐구한다.

책 제목이기도 한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치료 종료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자가 ‘치료받는 사람’에서 ‘말기돌봄을 받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신호다. 저자는 이 순간을 의료진의 판단, 병원의 제도, 환자와 가족의 대화, 치료계획의 변화, 환자의 이동과 돌봄이 교차하는 복합적 과정으로 추적한다.

책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말기를 분석한다. 첫째, 시간이다. 말기는 의사의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연명의료 중단 결정 이후에도 환자와 가족, 의료진의 대화와 문서 작성, 환자 명단의 ‘항암’에서 ‘완화’로의 분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현실에서 활성화된다. 둘째, 공간이다. 상급종합병원은 최첨단 의료기술이 집중된 곳이지만 말기 환자가 오래 머물기 어려운 곳이다. 환자는 집, 호스피스, 요양병원, 중환자실 등으로 이동하며, 각 장소는 환자와 가족에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저자는 환자를 다른 기관으로 보내는 ‘전원’을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괜찮은 장소’를 마련하는 돌봄으로 재구성한다. 셋째, 관계다. 저자는 완화의료팀과 함께 머리를 감기고, 족욕을 돕고, 환자와 가족의 대화를 이어주는 작은 행위들을 기록한다. 이러한 ‘관계-생성적 돌봄’은 환자가 가족과 못다 한 말을 나누고, 돌봄 제공자와 연결되며, 사별 이후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도록 돕는다.

2026년은 연명의료결정법 입법 10주년이다. 많은 이들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며 ‘좋은 죽음’을 준비하지만, 저자는 ‘좋은 죽음’이 단순히 연명의료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의 이분법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환자의 몸 상태, 가족관계, 경제적 조건, 의료 인프라와 법적 장치가 얽힌 현실 속에서 말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기라는 시간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지 묻는 일이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는 죽음을 사건이 아닌 과정으로 바라보며, 말기돌봄의 본질을 ‘관계 생성’으로 정의한다. 누구도 쉽게 심판하지 않고, 의료진과 가족, 환자의 최선이 때로 엇갈리고 충돌하는 현장을 끝까지 붙들며,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근원적으로 묻는다. 이 책은 ‘존엄한 죽음’을 넘어, 말기돌봄을 새롭게 상상하게 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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