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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씻어내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 신간 (화바이룽·서사원)

평범한 일상 뒤에 숨겨진 균열을 파헤치는 대만 장편 미스터리

한성욱2026년 4월 30일 오전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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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jpg출판사 제공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이후에서 시작하는 소설이다. 교도소에 수감된 전 남편을 면회하러 가는 여주인공 정팡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한 가정이 어떻게 균열을 맞고 무너져갔는지를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추적한다.

이 소설은 대만 문단에서 주목받아 온 작가 화바이룽의 장편 미스터리로, <연합문학 소설 신인상>, <연합보 문학상>, <린룽싼 문학상>을 석권하며 필력을 인정받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한국 독자에게는 이번이 첫 소개다. 화바이룽은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해 온 이력답게, 일상의 장면 속에 숨은 불안을 정확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해낸다.

정팡의 일상은 남편 밍런의 한 문장으로 무너진다.
“당신에 대한 감정이 죽었어. 어쩌면… 당신만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감정이 죽은 걸지도 몰라.”
밍런은 가족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코끼리’처럼 느껴진다는 기묘한 비유를 남긴 채 이혼을 통보한다. 평범했던 가정은 이 선언과 함께 균열을 드러내고, 정팡은 이해할 수 없는 상실감 속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이 소설은 이별의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어느 날 상처투성이가 된 채 돌아온 밍런은 한 달 뒤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는, 돌연 정팡에게 집 안 어딘가에 숨겨둔 ‘어떤 물건’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이튿날, 그는 구치소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유순하고 무던했던 남편이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무엇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는지, 그 의문은 소설의 중심부를 형성한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에서 미스터리는 사건의 반전을 위한 장치가 아니다. 이 작품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가장 가까웠기에 가장 알지 못했던 관계다. 정팡은 밍런이 남긴 단서들을 따라가며, ‘완벽한 일상’이라고 믿었던 시간 뒤에 숨어 있던 기괴하고 서늘한 진실과 마주한다.

소설은 가족과 결혼, 성(性), 책임이라는 주제를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다룬다. 밍런이 남긴 비밀은 단순한 범죄의 동기가 아니라, 관계 내부에 오랫동안 축적돼 온 억압과 무관심의 결과다. 작품은 “성이야말로 한 사람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문장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외면한 채 관계를 유지해왔는지를 독자 앞에 드러낸다.

‘코끼리’라는 상징은 이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이미지다. 코끼리는 거대하고 무겁고 피할 수 없는 존재다. 가족과 사회, 책임과 역할은 때로 개인의 삶보다 더 크고 무거운 짐이 된다. 밍런은 그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피를 택하지만, 정팡은 다른 선택을 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정팡은 코끼리를 ‘없애거나’ ‘피하지’ 않는다. 대신 목욕시키는 일을 택한다. 이는 비극을 감내하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진실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그 무게와 함께 살아가려는 선택에 가깝다. 정팡은 남편이 남긴 고통과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끝내 그것을 자신의 삶 안으로 끌어안는다.

이 소설이 끝내 도달하는 지점은 ‘완전한 회복’이 아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관계의 파편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대신 작품은 묻는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외면한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직면하고 감당할 것인가. 도망치지 않는 사람에게만 다음 페이지가 허락된다는 메시지는, 이 소설의 가장 단단한 윤리다.

이다혜 작가는 추천사에서 “산다는 건 죽어버린 꿈과 또 다른 죽어버린 꿈, 그리고 작디작은 희망 사이를 부유하는 일”이라고 썼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바로 그 부유의 상태를 정직하게 그려낸다. 이루지 못한 꿈과 남겨진 감정들, 쉽게 씻기지 않는 상처를 품은 채로도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이 작품은 끝까지 밀어붙인다.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스릴 넘치는 반전을 앞세운 미스터리라기보다, 관계의 이면을 끝까지 응시하는 심리소설에 가깝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은 곧 자신을 다시 세우는 과정과 맞닿아 있으며, 정팡의 선택은 독자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삶보다 더 크고 무거운 것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 작품은 말한다. 완전히 회복된 삶은 없을지라도, 각자의 균열과 상처 위에서 다시 살아가려는 태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회복이라고.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그 조용한 결단의 순간을 끝까지 따라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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