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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연의 선으로 마주한 기억의 상처, 『독과 나』 (한주연, 기역(ㄱ))
폭력의 기억과 삶의 균열을 300여 점 연필그림으로 기록한 흑연화 에세이
출판사 제공
폭력의 기억은 종종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과 장면은 삶의 깊은 층위에 남아 있다. 한주연 화가의 연필그림 에세이 『독과 나』는 그러한 기억을 직면하고 기록하는 작업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상처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사회 구조 속 갈등과 폭력의 문제로 확장되며, 흑연의 선과 글을 통해 삶의 흔적을 차분하게 되짚는다.
기역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열세 살 시절 경험한 신체적 폭력의 기억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 기억은 단순한 개인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연필과 지우개로 종이를 채워 가는 과정 속에서 일상의 긴장과 사회적 구조 속 폭력의 흔적을 300여 점의 흑연화로 기록했다. 선과 면을 반복해 긋고 채우는 작업은 종이 위에 작은 빛의 틈을 만들어내고, 그 틈은 상처를 다시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된다.
이 책의 특징은 폭력을 은유로 감추지 않는 태도다. 작가는 고통의 기억을 완곡하게 돌려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개인의 상처가 어떻게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폭력 구조와 맞닿아 있는지를 질문한다. 개인의 기억에서 출발한 기록이 사회적 현실을 성찰하는 시선으로 확장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필과 지우개로 이루어진 작업 방식 역시 의미를 갖는다. 지우고 다시 그리는 반복은 과거를 지워 버리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상처가 남아 있는 자리 위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 가려는 태도에 가깝다. 흑연의 무채색은 삶의 혼란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동시에, 그 속에서 평화와 치유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저자 한주연은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는 작가다. 글에서 그림이 흘러나오고, 그림 속에서 다시 문장이 태어나는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해 왔다. 지금까지 9회의 개인전을 비롯해 다수의 전시와 아트페어에 참여했으며, 이전 작품으로 『물 없는 바다를 건널 때』를 발표했다.
『독과 나』는 예술이 개인의 기억과 사회적 현실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업이다. 흑연의 차분한 선으로 기록된 그림과 글은 상처를 숨기지 않고 바라보는 용기, 그리고 그 기억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태도를 함께 담아낸다. 결국 이 책이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가 피하려 했던 기억을 마주할 때, 삶은 어떤 방향으로 다시 움직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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